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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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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1378년 서방 교회 대분열 시기에 선출된 첫 번째 대립교황이다. 본래 제네바 출신 로베르 추기경이었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에 의해 폰디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클레멘스 7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지지를 받으며 아비뇽을 중심으로 교황청을 운영했으나, 재정난을 겪었고, 우르바노 6세와 대립했다.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도 서방 교회 대분열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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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기본 정보
칭호대립교황
이름클레멘스 7세
출생명로베르 드 주네브
로마자 표기Robert de Genève
프랑스어 표기Clément VII
출생1342년
출생지샤토 드 안시, 사보이아 백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1394년 9월 16일
사망지아비뇽, 교황령
이전 직함도르셋 관구 부제, 캉브레 대주교, 테루안 주교
기타 직함제네바 백작
클레멘스 7세의 문장
교황 즉위
선출일1378년 9월 20일
착좌일1378년 9월 20일 (추정)
퇴위일1394년 9월 16일
반대 교황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이전 교황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대립 교황 세력:
니콜라오 5세
다음 교황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아비뇽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
서임
추기경 서임1371년 5월 30일
추기경 임명자그레고리오 11세

2. 생애

로베르는 1342년 안시 성에서 제네바 백작 아메데오 3세와 마오 드 불로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보이 가문 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2] 기 드 불로뉴는 그의 외삼촌이었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359년 교황청 서기장, 1361년 테루안 주교, 1368년 캉브레 대주교, 1371년 5월 30일 추기경이 되었다.[2] 1373년부터 도싯 부제[3], 1374년부터 윌트셔 미들 우드포드 만성도 교회 성직록[4]을 맡았으나 1378년에 모두 사임했다. 1375년부터 카운티 더럼 선덜랜드 민스터 교구 목사로 봉직하며 얻은 수입을 교황 선출 비용으로 사용했다.[5]

1377년 상부 이탈리아 교황 사절로 여덟 성인의 전쟁에 참전, 콘도티에로 존 호크우드가 이끄는 군대를 지휘하여 포를리 영토 체세나를 함락시켰다. 이때 3,000~8,000명의 민간인 학살을 승인하여 "체세나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18]

1392년 형제 제네바의 피에르가 사망하자 제네바 백작 지위를 물려받았다.[2] 네 형제가 모두 후사 없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백작 지위는 맏딸 마리와 그의 아들 움베르 드 토아르에게 넘어갔다.

1378년 콘클라베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된 후, 로베르는 프랑스 추기경들과 함께 우르바노 6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문

1342년 안시 성에서 제네바 백작 아메데오 3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7] 아버지는 제네바 백작 아메데 3세, 어머니는 오베르뉴 백작 겸 불로뉴 백작 로베르 7세의 딸 마오이다. 제네바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성직 생활도 프랑스에서 하여 친프랑스 성향을 가졌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교황청 서기, 테루안 주교, 캉브레 대주교를 거쳐 1371년 5월 30일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18] 어머니 쪽 사촌인 잔이 1349년 프랑스 왕 장 2세의 후처가 되면서 프랑스 왕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 2. 8성인 전쟁 참전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특사로 임명되어 교황령 군대를 지휘하며 8성인 전쟁에 참전했다.[19] 그는 잉글랜드 출신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 휘하의 용병들을 지휘했는데, 이때 그는 용병들이 요청한 체세나(Cesena) 시민들에 대한 학살을 승인하였다. 1377년 2월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최소 약 3,000명에서 최대 8,000명 정도가 학살당했다.[18] 이 학살로 교황령에 대한 재정복은 신속히 진행될 수 있었으나 무고한 양민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그는 교황령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18] 존 호크우드가 제공한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포를리 영토의 작은 도시인 체세나를 함락시켰다. 체세나는 한 세대 만에 두 번째로 교황령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그곳에서 그는 3,000~8,000명의 민간인 학살을 승인했는데, 이는 당시의 전쟁 규칙으로도 잔혹한 행위였으며, 그에게 "체세나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18]

2. 3. 1378년 콘클라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아비뇽 유수가 종료되면서 1377년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듬해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자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 출신 교황이 선출되어 아비뇽 유수가 재현될 것을 우려하여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다수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로마 시민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였고, 1378년 4월 8일에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남부 이탈리아 바리의 대주교 바르톨로메오를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하였다. 이는 로마인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는 싫었고 프랑스 출신을 선출할 경우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인사를 서둘러 선택한 것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 출신 교황을 원했지만, 프랑스 출신이 아닌 이탈리아인이 선출된 것에 만족하였다.

1378년 3월 27일,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고 로마에서 콘클라베가 열렸다.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출신 새 교황을 요구하며 추기경단을 압박했고, 결국 4월 8일 추기경단은 나폴리 출신의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다.

3. 대립교황 선출

교황 우르바노 6세추기경단 간의 갈등 끝에, 1378년 9월 20일 폰디에서 로베르 추기경이 대립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 7세로 명명되었다. 이는 서방 교회 대분열의 시작이었다.[6] 우르바노 6세 군대에 패배한 후, 클레멘스 7세는 나폴리로 피신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아비뇽으로 도피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지지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 플랑드르, 스코틀랜드 왕국 등이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부르고뉴 공국와 사보이 백국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클레멘스 7세가 미사를 집전하는 14세기 세밀화


1378년 11월 29일, 클레멘스 7세는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나폴리 왕국 왕위를 약속하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루이 1세는 1384년 사망했다.[6] 이후 루이 2세 드 앙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등과 동맹을 모색했다.

클레멘스 7세는 가톨릭 유럽의 반대를 무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정치적 지지를 위해 33명의 추기경 중 19명을 임명했지만, 진정으로 분열을 종식시키려는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1. 대립교황 피선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취임 후 추기경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우르바노 6세의 성품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고 조직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아비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로마 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신임 교황과 사사건건 충돌했다.[20] 갈등이 지속되자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논의 끝에 우르바노 6세의 교황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교황 선거가 로마 시민들의 강압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폰디로 장소를 이동한 후 1378년 9월 20일 제네바 출신 로베르 추기경을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20]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6세는 퇴위할 수 없다고 버티며 새로 선출된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고 로마에서 교황 선거(콘클라베)가 열렸다. 이탈리아 출신 새 교황을 요구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4월 8일 추기경단은 압력에 굴복하여 나폴리 출신의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다. 추기경 중에서 처음으로 우르바노 6세 지지를 표명한 로베르였지만, 교황 즉위 후의 거친 행동에 실망한 그는 다른 프랑스인 추기경들과 함께 대립을 심화시킨다. 8월 9일 로베르를 포함한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아나니에서 우르바노 6세 선출의 무효를 선언, 9월 20일 폰디에 모여 교황 선거를 다시 실시했고, 그 결과 로베르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로베르는 1378년 9월 20일,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청을 복귀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에 의해 폰디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클레멘스 7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했고, 서방 교회 대분열의 '교황'(현재 대립교황으로 간주) 계열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3. 2. 서방 교회 대분열

서방 교회 대분열은 1378년 교황 우르바노 6세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이 폰디에서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면서 시작되었다.[21] 클레멘스 7세는 우르바노 6세를 로마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하고, 1379년 5월 나폴리 왕국조반나 1세의 도움을 받아 아비뇽으로 도피하여 새로운 교황청을 조직하였다.[21] 이로써 서방 교회는 두 명의 교황이 공존하는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이 나뉘었다.[22]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적극 지지하였고,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등이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반면, 잉글랜드 왕국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22]

두 교황은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사권을 남발하였고, 이는 분열이 교구, 수도원, 가정에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22] 각 지역 교회는 두 명의 대주교, 주교, 본당신부를 갖게 되었고, 신자들마저 양측 추종자로 분열되었다. 성직자들은 서로 합법성을 주장하며 상대를 파문하여 유럽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또한, 두 개의 교황청 운영으로 재정 소요가 증가하여 신자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22]

클레멘스 7세는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나폴리 왕국 왕위를 약속하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루이 1세는 1384년 9월 20일 비스첼리에에서 사망했다.[6] 이후 클레멘스 7세는 루이 2세 드 앙주를 지원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등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1389년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한 후 로마에서는 보니파시오 9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 9세는 클레멘스 7세에게 퇴위를 요구하고 파문을 선언했고, 클레멘스 7세도 이에 맞서 보니파시오 9세를 파문했다. 결국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9월 16일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아비뇽에서는 베네딕토 13세가 선출되면서 교회 대분열은 계속되었다.

4. 아비뇽 교황청 운영과 갈등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378년 9월 20일,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복귀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로마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에 의해 폰디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6] 그는 클레멘스 7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했고, 서방 교회 대분열의 첫 번째 대립교황이 되었다. 우르바노 6세의 군대가 마리노에서 승리한 후, 클레멘스 7세는 나폴리 여왕 조안나 1세의 보호를 받았으나, "우르바노 교황 만세"와 "적그리스도여 죽어라"를 외치는 지역 주민들의 공격으로 나폴리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배를 타고 아비뇽으로 도망쳤다.[6]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클레멘스 7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였다.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라틴 동방의 많은 부분, 플랑드르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6] 부르고뉴[6]와 사보이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6]

1378년 11월 29일, 클레멘스 7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되었다.[6] 클레멘스 7세는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자신의 편에서 무기를 들도록 부추겼고, 루이 1세는 약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벌였으나,[6] 1384년 9월 20일 비스첼리에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앙주 공작 루이 2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아르마냑 백작 장 3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야망과 궁정의 재정적 필요 때문에 성직 매매, 토지 손실, 착취 등에 의존하여 지지자들 사이에 불만을 낳았다.[6] 그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총 33명의 추기경 중 19명을 임명했지만,[6] 분열을 진정으로 종식시키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4. 1. 아비뇽 교황청

1379년 4월 로마 공략에 실패한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인 추기경들의 의견에 따라 아비뇽에 교황청을 설치했다.[6] 교황령으로부터의 세수를 기대할 수 없어 재정난에 빠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까지 비과세 대상이었던 수도원에 과세하고 증세를 강행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6]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나폴리 왕국 여왕 조반나 1세는 클레멘스 7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보이아 공국, 시칠리아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합스부르크 가문 등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 포르투갈 왕국)은 처음에는 중립이었으나, 나중에 클레멘스 7세 지지로 돌아섰다.[6]

1389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한 후, 로마의 추기경단은 보니파시오 9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클레멘스 7세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클레멘스 7세를 파문했다. 클레멘스 7세 역시 보니파시오 9세를 파문하며 맞섰다. 결국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9월 16일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아비뇽의 추기경들은 베네딕토 13세를 다음 교황으로 선출하여 교회 대분열은 계속되었다.[6]

4. 2. 로마 교황과의 대립

1378년 9월 20일, 아비뇽에서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에 의해 폰디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로베르는 클레멘스 7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했다.[6] 이는 1417년까지 지속된 서방 교회 대분열의 '교황'(현재 대립교황으로 간주) 계열의 첫 번째 인물이었다. 우르바노 6세의 군대가 마리노에서 승리한 후, 클레멘스는 나폴리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배를 타고 아비뇽으로 도망쳤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나폴리 왕국 여왕 조반나 1세는 클레멘스 7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사보이아 공국, 시칠리아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합스부르크 가문 등의 세속 군주와 교회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반면, 룩셈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 (사후에는 아들 벤체슬라오), 잉글랜드 왕국, 이탈리아 중부 및 북부, 독일의 대부분 등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중립이었던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 포르투갈 왕국)은 나중에 클레멘스 7세 지지로 돌아섰다.

1379년 4월, 클레멘스 7세는 로마 공략에 실패하고, 프랑스인 추기경들의 의견에 따라 아비뇽에 본거지를 두었다. 그러나 중요한 재원 기반인 교황령으로부터의 세수를 기대할 수 없어 곧 재정난에 빠졌다. 이 때문에 클레멘스 7세는 지금까지 비과세였던 수도원에 대한 과세를 강행하고, 그 외에도 증세를 강행하여 불만을 샀다.

1378년 11월 29일, 클레멘스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나폴리의 왕위는 우르바노 6세가 공인하는 카를로 3세 (조반나 1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계통과 클레멘스 7세가 공인하는 루이 1세 드 앙주 계통이 병립하는 사태를 초래하여, 카를로 3세의 아들 라디슬라오는 로마를, 루이 1세의 아들 루이 2세 드 앙주는 아비뇽을 지지하며, 각 교황의 권위를 뒤에 업고 격렬하게 다투었다.

1389년에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자 클레멘스 7세는 교황좌를 통일하기 위해 로마의 추기경단이 자신을 다시 콘클라베에서 선출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9세가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즉위 후 곧바로 클레멘스 7세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클레멘스 7세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클레멘스 7세도 보니파시오 9세의 파문을 선언하며 맞섰다.

4. 3. 외교적 노력과 한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로마 교황 선출에 대해 사전에 의견을 구했던 것으로 보이며, 곧 클레멘스 7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6]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라틴 동방의 많은 부분, 플랑드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6] 그는 또한 독일 전역에 지지자를 두었으며, 포르투갈은 두 차례 그를 인정했지만 나중에 그를 버렸다.[6] 부르고뉴[6]와 사보이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6]

1378년 11월 29일, 클레멘스 7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되었다.[6] 나폴리 여왕 조안나 1세의 계승에 대한 기대와 함께, 클레멘스 7세는 샤를 5세의 형제들 중 장남인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자신의 편에서 무기를 들도록 설득했다. 이 제안으로 거의 전적으로 클레멘스 7세의 비용으로 수행된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고, 첫 번째 원정에서 루이 1세는 약 4만 명의 군대를 이끌었다.[6] 그러나 원정은 실패했고, 루이 1세는 1384년 9월 20일 비스첼리에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업들은 여러 차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 앙주 왕가의 지배를 심었고,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결과는 프로방스를 앙주 공작과 그 후 프랑스 왕에게 확보해 준 것이었다. 루이 1세의 죽음 이후, 클레멘스 7세는 그의 아들이자 동명의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서 용감하고 관심 있는 지지자를 찾기를 바랐고, 그에게 교황령의 더 큰 부분을 기증했다. 클레멘스 7세는 그 다음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아르마냑 백작 장 3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가 로마로 진출할 가능성은 항상 클레멘스 7세의 눈앞에 있었고, 그의 생각 속에서 프랑스 군대의 무력은 그의 경쟁자에게 승리하는 영광스러운 도구가 될 것이었다.[6]

그러나 클레멘스 7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꿈이 덧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그는 생애 말년에 가톨릭 유럽 대부분의 신념에 기반한 반대를 무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6] 더욱이, 그의 야망과 궁정의 재정적 필요는 성직 매매, 토지 손실, 착취에 의존하여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 불만을 낳았다.[6] 그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총 33명의 추기경 중 19명을 임명했지만,[6] 분열을 진정으로 종식시키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5. 말년과 사망

교황 우르바노 6세가 1389년에 사망하자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샤를 6세의 외교 경로를 통해 로마의 추기경들과 접촉했다. 분열을 일찍 끝내고자 자신을 우르바노 6세의 후계자로 추대해줄 것을 제안했으나, 로마 추기경들은 보니파시오 9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독일, 잉글랜드,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의 지지를 받았고,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두 교황은 서로를 파문했다.

클레멘스 7세는 나폴리 여왕 조안나 1세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지만, "우르바노 교황 만세", "적그리스도여 죽어라"를 외치는 지역 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나폴리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배를 타고 아비뇽으로 도망쳤고, 5명의 추기경이 그를 맞이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로마 교황 선출에 대해 사전에 의견을 구했던 것으로 보이며, 곧 클레멘스 7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라틴 동방의 많은 부분, 플랑드르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독일 전역에도 지지자가 있었으며, 포르투갈은 두 차례 그를 인정했지만 나중에 버렸다. 부르고뉴와 사보이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1378년 11월 29일, 클레멘스 7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조안나 여왕의 계승에 대한 기대와 함께, 클레멘스 7세는 샤를 5세의 형제인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무기를 들도록 부추겼다. 이는 클레멘스 7세의 비용으로 수행된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어졌고, 루이 1세는 약 4만 명의 군대를 이끌었으나,[6] 1384년 9월 20일 비스첼리에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앙주 왕가의 지배를 심었고, 프로방스를 앙주 공작과 프랑스 왕에게 확보해 주었다. 루이 1세 사후, 클레멘스 7세는 그의 아들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교황령의 더 큰 부분을 기증하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또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아르마냑 백작 장 3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 군대의 무력으로 로마에 진출하여 경쟁자에게 승리하는 것을 꿈꿨다.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9월 16일 아비뇽에서 죽었다. 말년에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의 야망과 궁정의 재정적 필요는 성직 매매, 토지 손실, 착취로 이어져 지지자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다.

5. 1. 몰락과 죽음

교황 우르바노 6세가 1389년에 사망하자,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샤를 6세를 통해 로마의 추기경들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추대해 줄 것을 제안했지만, 로마 추기경들은 보니파시오 9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6] 보니파시오 9세는 독일, 잉글랜드,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고,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두 교황은 서로를 파문했다.[6]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9월 16일 아비뇽에서 사망했다.[6] 말년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6] 그의 후임으로는 베네딕토 13세가 선출되어 서방 교회 대분열은 계속되었다. 그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총 33명의 추기경 중 19명을 임명했지만, 분열을 진정으로 종식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5. 2. 평가

클레멘스 7세는 서방 교회 대분열을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1378년 교황 우르바노 6세에 대항하여 폰디에서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1417년까지 이어진 서방 교회 대분열 시기 동안의 대립교황 계열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6]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를 비롯하여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스코틀랜드 등 여러 지역의 지지를 받았지만,[6] 성직 매매, 토지 손실, 착취 등으로 지지자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하기도 하였다.[6] 그는 분열을 종식시키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6]

결국 그는 정식 교황이 아닌 대립교황으로 기록되었으며, 서방 교회 대분열 기간 동안의 불확실성은 공의회주의라는 새로운 법 이론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6]

참조

[1] 문서 BNF ms français 2664, fol. 10v 1400-01-01 #15th century를 대략적인 연도로 변환
[2] 백과사전 Clément VII
[3] 웹사이트 Fasti Ecclesiae Anglicanae 1300–1541 http://www.british-h[...] 1962
[4] 웹사이트 Photo – list of Prebends https://commons.wiki[...]
[4] 웹사이트 Photo – detail confirming Clement's inclusion https://commons.wiki[...]
[5] 웹사이트 Rectors of Sunderland Minster – 1375 Robert Gebenens http://www.sunderlan[...]
[6] 웹사이트 Papa Urbano VI e il Regno di Napoli http://cronologia.le[...] 2016-04-24
[7] 문서 バンソン、P128 - P129
[8]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P658
[9] 문서 バンソン、P129
[10] 문서 瀬原、P184
[11] 문서 スチュアート、P183
[12] 문서 スチュアート、P179、瀬原、P215、バラクロウ、P284 - P285
[13] 문서 スチュアート、P179 - P180、瀬原、P232、バラクロウ、P285
[14] 문서 スチュアート、P180 - P181
[15]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01
[16] 서적 Condottiere 1300-1500: Infamous Medieval Mercenaries Osprey Publishing 2007
[17] 문서 안시(Annecy)는 현재 프랑스에 속하나 본래 제네바 공국의 수도였다. 1401년에 사보이 공국에 양도되었으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에 정복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의 남동쪽에 있으며 스위스 제네바로부터 남서쪽 35km에 위치하고 있다.
[18] 서적 Between Church and State: The Lives of Four French Prelates in the Late Middle Ages
[19] 문서 8성인 전쟁은 피렌체가 주도하여 여러 도시국가들 간에 결성된 연합군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대항하여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피렌체 시뇨리아가 임명한 8명의 위원회가 전쟁 진행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 치루어진 전쟁이기에 8성인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0] 간행물 Seeking Legitimacy:Art and Manuscripts for the Popes in Avignon from 1378 to 1417 Brill 2009
[21]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01
[22] 지식백과 교회 대분열의 시작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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